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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모르는 난임, 질병 아닌 적응”

기사승인 2015.05.26  16: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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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식에 비우호적인 환경을 바꿔야

   
▲ 정자에 둘러싸인 난자를 현미경으로 촬영한 장면

‘불임은 질병인가?’ 지난 칼럼에 이어 이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일 년 넘게 아무리 노력해도 임신이 되지 않아 병원을 찾습니다. 하라는 검사를 다 했는데도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명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원인불명 난임’의 진단을 받았을 때, 치료가 필요할까요? 아니면 이상이 없으니까 치료할 필요 없을까요.

10년 넘게 진료실에서 난임 환자를 만나던 어느 날 뜬금없이 떠오른 이 질문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답을 찾아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진료실을 잠시 비우고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만난 것이 진화 인류학(evolutionary anthropology)이고, 생식 생태학(reproductive ecology)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오랜 진화의 역사를 살피고 공간적으로는 지구의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여러 민족의 임신, 출산 패턴을 분석한 연구들을 공부했습니다. 다행히도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병이 아니라 적응...못하는 것 아니라 안 하는 것일 수도”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정해진 시간 동안 제한된 에너지를 사용해 성장하고, 몸을 유지하며, 자손을 낳는 재생산을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성공적인 재생산, 즉 나의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많이 남기는 것인데요. 이를 위해서는 치밀한 전략과 거래가 필요합니다.

임신하고 출산하려면 충분한 성장과 성적인 성숙이 필요하니 청소년기까지는 성장에 에너지를 많이 씁니다. 초경을 시작하면 여성은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만 무턱대고 임신을 많이 하는 게 성공적인 재생산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한 인간을 임신, 출산, 양육하는 데는 어떤 동물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지요. 형편에 맞는 적절한 수의 건강한 아이를, 적절한 시기에 출산하는 것이 현명한 재생산의 전략입니다. 엄마가 건강하지 않은 시기에 무리하게 임신하면 건강하지 못한 아이가 태어나 생식이 가능한 나이까지 살아남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엄마는 임신, 출산에 괜한 힘만 쏟았지 목표했던 자손의 번식에는 실패한 것입니다. 또한, 무리하게 임신해 어렵게 출산하다가 엄마가 건강을 해치면 이후에 더는 생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건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힘들게 새로운 임신과 출산을 하면 이전에 낳은 아이도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해 함께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건강이 좋아질 때까지 잠시 임신을 미루는 게 현명한 선택입니다. 인류는 건강한 임신과 출산, 양육에 불리한 환경에서는 생식을 잠시 멈추고 거기에 쓸 에너지를 몸의 유지에 사용하도록 진화해왔습니다. 지금 당장은 임신을 못(안)하더라도 좀 더 긴 생애주기로 봤을 때는 건강한 자손을 남길 수 있는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세계적인 생식 생태학자인 하버드대학의 엘리슨(Ellison) 박사는 이를 “생식에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생식기능이 억제되는 것은 병리(pathology)가 아니고 적응(adaptation)”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생식에 비우호적인 환경이 문제”

그렇다면 생식에 비우호적인 환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대표적인 예로 많은 학자들이 ‘에너지 불균형’을 꼽습니다. 비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몰아치거나 추위, 무더위 등으로 음식이 부족할 때, 또는 계절이나 환경의 영향으로 노동강도가 높아지는 시기에는 들어오는 에너지보다 나가는 에너지가 더 많아집니다. 내 몸이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해지는 것이지요. 이때는 잠시 생식기능을 억제하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질병이 창궐하고 적의 침입 위험이 클 때도 생식에 우호적인 환경은 아닙니다. 육체적인 스트레스 때문만이 아닙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높은 환경 또한 임신과 출산에 방해가 됩니다.

태어나는 아이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까요? 다른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일어서고 걷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이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양육과정에서 주변의 도움이 필수적이라 사회적 지원(social support)이 부족한 것도 생식에 불리한 환경입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의 지도교수인 벤틀리(Bentley) 박사를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는 세계 각지의 현지조사를 통해 생식에 비우호적인 환경에서 여성의 난소기능이 억제되고 있음을 증명했는데요.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 칼럼에서 하겠습니다.

“치료로 개선,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환경의 변화”

   
▲ 움여성한의원 문현주 원장

자, 이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임신이 잘 안 되는 난임, 특히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원인불명 난임이라면 아픈 것(illness)도 아니고 질병(disease)도 아닙니다. 오히려 진화학적 측면에서는 ‘적응(adaptation)’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생식에 비우호적인 환경’입니다. 이 환경이 금세 개선될 수 있다면 때를 기다리면 되지만 그게 아니라면, 또는 지금 절실히 임신을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이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먼저, 건강한 임신을 위한 최적의 몸을 만들어야겠지요. 치료가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또한 스트레스를 직접 풀어주지는 못해도 스트레스 때문에 소통되지 못하는 에너지는 치료로 개선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위의 두 가지 모두 한의학적 치료로 어느정도 가능합니다. 한의학의 장점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치료는 생식에 불리한 환경 일부만을 겨우 개선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근본적으로는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회적 환경을 진단하고 바꿔야 합니다. 생식에 유리한 사회적 환경에서 우리 몸은 ‘아, 지금이 바로 임신할 때구나!’라고 판단해 임신을 위한 최대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현주의 여성의학:움 이야기>에서는 여성의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문현주 원장 news@healthdaynews.co.kr

<저작권자 © 헬스데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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